몇 년 전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RISD, 리즈디)에 합격한 여자 제자의 스펙:
- SAT: 1800 중반대
- GPA: 3.5 정도
- 그림실력: 보통 (압구정 학원 수강)
- 활동: 몇몇 학회 표지 디자인
- 에세이 주제: 인간의 악에 대해
그 외에 스펙면에서 특이사항은 없었음.
리즈디는 지원 포트폴리오 필수조건 중에 자전거 그림이 있다. 그리고 모든 합격생의 자전거 그림을 학교에 전시한다. 위 제자 왈,
"입학 후 합격생의 자전거 그림을 봤더니, 제가 제일 못그렸어요. 정말 기술적으로 뛰어난 그림도 있었지만, 대부분 아이디어면에서 기가막힌 작품들였어요. 그림 하나는, 백지의 구석에 정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그린 자전거도 있었고...아무튼, 모두 대단한 그림였어요."
이처럼 리즈디는 학생을 선발할 때, 그 학생이 얼마나 그림을 기술적으로 잘 그리는지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어차피 입학하면 우리나라 미술학원처럼 다시 그림을 배우게 한다. "너가 어디서 얼마나 대단한 그림 실력을 닦았던 상관 안 한다. 여기서 제대로 배워라"식이다.
필자의 제자도 그림 실력이 대단하지 않았다. 미술 영재도 아녔고,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하지도 않았고, 단지 디자인에 좀 관심이 있었을 뿐이고, 포트폴리오 학원도 오래 다닌 게 아녔다. 그런 학생이 미국 제1의 미대에 붙은 건 놀라운 결과였다.
다른 많은 합격자도 그랬겠지만, 이 학생이 붙은 이유는 바로 이 학생만의 독특한 예술적 세계관였다. 이 학생은 인간의 어두운 면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이 세상의 밝은 면보다는 어둡고, 공포스럽고, 비관적인 세계관이 이 학생의 작품 속에 표현되었다: 죽음, 병, 전쟁, 공해, 천재지변, 사고, 동물학대 등. 특이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 이런 분야의 책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공포소설, 추리소설 등은 물론이고 인간의 가장 악한 면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 어리고 예쁜 하얀 얼굴의 여학생에게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그런 어두운 세계에 관해서만 읽었다. 부모의 걱정도 심했다. 너무 비관적이고 부정적 사고로 인해 혹시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상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아닐까? 의상도 늘 검은색만 입었다. 학생의 그림을 보면, 어른이 봐도 얼굴이 찡그러지게 되는 어둡고, 징그럽고, 공포스러운 그림 뿐이었다. 이처럼 이 학생은 자기만의 특이한 세계관이 있었고 그걸 포트폴리오에 담았다.
에세이도 그런 내용였다. 천재지변 등 각종 대형사고로 목숨을 잃는 인간의 모습이나, 유럽에서 90년대 행해진 인종말살 전쟁 등 인간의 불행과 악한 모습에 대한 혐오를 다룬 에세이였다. 에세이를 읽어보면 이 학생은 정말 어둠 그 자체구나 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의 비관적인 내용였다. 하지만, 독특하고, 남들이 안 하고, 특히 남들이 하기 두려워하는 것을 시도할 줄 아는, 그리고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있는 학생을 찾는 리즈디는 이 학생을 알아보고 합격을 시켰다. 그림 실력은 그저그랬어도.
고등학생이 그림을 잘그리면 얼마나 잘그리겠는가?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고, 스스로 사고할 줄 알며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다. 이렇게 하려면 독서를 안 할 수가 없다. 독서가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결과를 원한다면 미술학원 가서 그림 배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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